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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7. 17世 〉21. <부정공>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행숙천군호부사공휘진부묘표(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肅川都護府使公諱鎭溥墓表)
1. 문헌 목록 〉17. 17世 〉23. <부정공>죽천거사조공휘현귀묘갈명(竹川居士趙公諱顯龜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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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부정공>동지공휘용부전(同知公諱龍溥傳)
同知公諱龍溥傳 公諱龍溥字鶴叟趙氏其先自松慶南渡玉川因封爲籍即高麗輔國玉川君諱元吉之裔也君之子諱瑜麗季爲副正抗節於我累徵不起當時杜門賢中不幾指矣是復移於昇平子姓蕃衍冠冕文學不乏絶蔚然爲南省之糞北也在昔 正廟初月 贈參判諱應臣遯居于尺巖山中以淸德聞世世稱曰孤隱處士處士得異夢生公公自幼慧悟不凡學語便知讀書能曉大義往往有驚人語且擩染箕裘之見能皷琴善書畵一代名公碩德之從處士遊者每試叩質公應對如流皆稱以遠大之器處士雖爲不家代能接來賓間有列邑宰之造廬者其旄車燦輝笙簧轟騰人爭披糜之不暇而公惟顔色不動雍容禮酬宰奇之以物致情固辭不受或文房之具則受之而即報以手寫蘭畵竹篆得去者以爲寶藏焉五歲失慈哀呼踊仆抱屍不欲離觀者釀悲甫弱冠學文大就聲譽日高處士嘗戒曰顧今世道日趨於下惟深藏林間講明古書母廢先業而己不以仕進望爾也公始以進取爲計及聞此戒猛割于心復閉門刻若歛華就實硏窮性理之原講究經禮之節不明不措且汎濫百家上自推步星曆下至地理醫藥律呂率皆通曉不欲安於一成及處士歿哀毁執禮一如處士之孝於其親人莫不歎曰孝子之門復出此孝處士可謂厚得其報矣前此公夙遭兄喪丘嫂亦從殉以是挾宗業而業素淸寒者經喪之餘益復剝落所遺花本琴書而己蕭然人不堪其憂而猶能絲誦之聲不絶于戶外其規模節度專以家學爲準內守益堅不求聞達一日火起本第延及處士之花亭其杯棬書籍掇拾無幾公慟哭自絶如不欲生及翌年乃移卜于距尺巖五里白鹿之村力耕數載漸復舊業有餘每啓書籍篋輒 揮涕曰此吾先人之所殖也後人不殖則將落而顧此不肖讀不能軆守加之以天殃委心形役者久矣俯仰穹壤此罪難贖惟所可追於萬一者第仁善好施先人平生之志而常病貧不能博濟今則業勝於前將隨力承述以效微忱乃散其嬴財施於鄕里親戚僚友之窮窶弟之子相五凡三敗其業而辦資拯之者亦三尤眷眷於奉宗殫力綢繆厚樹其根置祭田具墓石而伸追養之誠洞設學庫使後生贍其講資且倣行紫陽夫子白鹿規而諄諄導之與從弟正溥協議修鄕約於坊內振興頹俗丙寅沁都洋變正溥將糾旅赴敵公力設壺簟之饋而獎勵之晩年了婚嫁之後以一琴一驢遍遊於山水之間每遇淸絶處則操弄罷復歌詩詞翛然有出塵之想識者謂其胷次灑落方之古尙子一不讓焉且曰小孤隱所居有園林泉石之勝闢一齋極其瀟灑扁以守性因爲自號作詩見志曰受命于天賦此身不違吾性是吾仁對人存敬陳誠意接物無私得正均隨分渾忘形外事安常惟勉箇中眞平生自憶罔攸愧漁水樵山只逸民日事嘯咏視紛囂勢利泊如也寫桃源漁舟首陽採薇穎水洗耳之圖掛之左右翫賞艶慕時有良朋來訪縱酒圍碁於松陰之下悠然相怡適御史李某潜訪題詩而去有聖朝正急求賢意那識南州有逸民之句云 高宗庚午蒙優老典階通政後加至嘉善及崇祿大夫同知中樞府事及公之歿也一鄕之人莫不哀之可想其生也咸慕之而所謂壽福康寧攸好德考終命公殆兼之而無愧矣公儀容魁偉休休有長者風有好善嫉惡之心而未嘗露其圭角有傷時輕俗之志而未嘗言及時事爲文章好簡古厭浮糜授筆立就而亦不逸於法律之外有遺稿藏于家所著中性理論明天人體用之切者也感慕詞窮年思親之至者也居家訓貽敎義方之明者也如此等篇非徒一家之私有亦可曰推類而及於世敎者矣哲少小聞公之風窃擬一承敎而遷延未遂深切慚恨繼而聞公之胤孫炳昱飭躬力學兼工書畵克述祖武云復願一握而今焉日迫崦嵫亦不可遂且問之其族直鉉甫則炳昱亦己作千古人嗚呼噫唏輔眄之頃滄桑固如是夫耶謹按公行略因節其行之槩於此要備太史氏之採擇矣 順興 安鍾哲 撰 進士 동지공휘용부전(同知公諱龍溥傳) 공의 휘는 용부(龍溥)요 자는 학수(鶴叟)며 조씨선세(趙氏先世)는 송경(松京)으로부터 남으로 옥천(玉川)에 내려와 인봉(因封)하여 관적(貫籍)하였으니 바로 고려보국옥천군휘원길(高麗輔國玉川君諱元吉)의 후예이다. 군의 아들 휘 유(瑜)가 려말에 부정(副正)으로 아조에 항절(抗節)하여 여러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니 당시 두문동(杜門洞) 七十二 현(賢)중에 몇 손가락안에 꼽히었다. 이후에 다시 승평(昇平)으로 이사하여 자손이 번창하고 과환과 문학이 끊어지지 아니하니 울연히 남향의 기북(糞州北方千里馬產地)이었다. 정조초(正廟初)에 증 참판 휘 응신(贈參判諱應臣)이 척암 산중(尺巖山中)에 살며 맑은 덕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나니 당시 사람이 고은처사(孤隱處士)라 칭호하였다. 처사가 기이한 꿈을 얻어 공을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깨우침이 비범(非凡)하여 말을 배우며 일찍 글을 읽을 줄 알아 능히 대의를 깨닫고 가끔 사람을 놀리게 한 일이 있었으며 또 가업(家業)의 보는 바를 이어 거문고에 능하고 글과 그림을 잘 하니 일대(一代) 명공(名公)과 석덕(碩德)이 처사를 쫓아 노는자 매양 시험하여 물으면 공이 응대여류(應對如流)하니 다 원대한 그릇이라 칭도하였다. 처사가 비록 집을 바꾸지는 않았으나 오는 손님을 능히 접대하니 간혹 여러 고을 수령이 집을 찾으면 그 기(旗)와 수레가 찬란히 빛나고 피리 젓대 소리가 높으면 사람이 다투어 엎드려 조아리는데 공은 오직 낯빛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화한 얼굴로써 수작하니 수령이 기특히 여겨 물건으로써 정을 표하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며 혹 문방四우(文房四友)면 받아서 곧 손수 그린 난호와 대나무 그림으로써 갚으니 얻어 간 자가 써 보물로 수장하였다. 五세에 어머니를 잃고 슬피 부르고 뛰며 엎드려 시신을 안고 떠나고저 아니하니 보는 자가 모두 슬퍼하였다. 겨우 二十세에 학문이 크게 진취하고 명성이 날로 높으니 처사가 일찍 경계하되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도덕이 날로 퇴폐하니 오직 길이 수풀사이에 숨어 옛 글을 강명하여 선업을 버리지 말 것이요 사환진취(仕宦進取)는 바라지 않는다 하시니 공이 처음엔 진취를 결 정하였다가 이 훈계를 듣고 각심하여 다시 문을 닫고 몹시 애써 화려한 것을 거두고 진실한 것을 취하며 성리(性理)의 근원을 연마하고 경례(經禮)의 절차를 강구하여 이해할 때까지 놓지 아니하고 또 백가서를 통람하여 위로는 추보성역(推步星曆)으로부터 아래로 지리의약율여(地理醫藥律呂)에 이르기까지 모두다 통효(通曉)하고 한가지의 성취에 만족코자 아니하였다. 처사공이 별세하매 애훼집예(哀毁執禮)를 처사가 그 어버이에 효도한 것 같이하여 사람들이 감탄하여 가로되, 효자의 문에 다시 효자가 났다 하니 처사는 가히 그 보답을 후히 받았다 하리로다. 앞서 공의 형이 일찍 세상을 하직하매 형수가 따라서 죽으니 공이 종가의 산업을 돕는데 산업이 본래 청한(清寒)한지라 삼년상을 지낸 뒤에는 더욱 박락(剝落)하여 남아있는 것이라고 꽃나무와 거문고 책뿐이었다. 쓸쓸하여 타인 같으면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오히려 능히 거문고와 노래소리가 문밖에 끊이지 아니하니 그 규모와 절도를 가히 알겄도다. 어느날 본가에서 불이 일어나 처사의 화정(花亭)까지 연소하여 그 서재의 서적을 남김없이 소실하니 공이 통곡 자절(自絶)하고 살고저 하는 뜻을 갖지 않았다. 다음해에 척암(尺巖)에서 五리쯤 떨어진 백록이라는 마을에 이거하여 두어해 밭같이를 힘쓰니 점차 구업을 회복하여 여유가 있어 매양 책룡을 열고 문득 눈물을 뿌리며 이것은 내 선인(先人)이 구입한 것이라 뒷 사람이 더 구입치 않으면 장차 떨어지는 것인데 돌아보건대, 이 불초가 능히 지키지 못하고 천재(天災)로서 소실하였으니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 살피매 이 죄를 면하기 어렵도다. 오직 만에 일이라도 따를 바는 이에 어질고 착하게 선인(先人) 평생의 뜻을 이어 좋게 베풀 것인데 항상 병들고 가난하여 능히 널리 구제치 못하다가 지금은 가산이 전보다 나으니 장차 힘을 따라 이어 기술하여 적은 성의를 다하리라 하고 이에 그 남은 재물을 흩어 향리에 빈한한 친척과 벗에게 시여하였다. 아우의 아들 상오(相五)가 무릇 세번 패가하였는데 세번 규제하고 더욱 후히 종가를 받들어 힘을 다하여 치밀하게 그 근본을 세우고 제전과 묘석을 갖추어 추모의 정성을 다하며 마을에 서고를 설치하여 후생의 학자를 풍비케하고 또 자양부자(紫陽夫子 朱子)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모방 실행하며 거듭 일러 친절히 교도하였다. 종제 정부(正溥)와 함께 방내(坊内)에 향약을 만들어 무너진 풍속을 진흥하고 병인(丙寅)년 심도양요(강화도양요)때에 정부(正溥)가 장차 의병을 모집하여 전진에 나가고저 하니 공이 힘써 군기와 자량을 보내고 장려하였다. 만년에 남은 여가를 마치고 거문고를 가지고 노새를 타고 산수사이에 두루 놀며 매양 승경을 만나면 두어곡 거문고를 희롱한 후에 다시 노래하고 시사(詩詞)가 민활하여 진세를 벗어난 기상이 있으니 아는 사람이 그 흉금이 쇄락함을 감탄하였다. 또 소고은(小孤隱)사는 곳에 원림천석(園林泉石)의 승경(勝景)이 있어ᅵ 열인 일재가 극히 소쇄하니 수성(守性)이라 현판하여 이것으로 스스로 호(號)하고 시를 지어 뜻을 붙히되 명을 하늘에서 받아 이 몸을 타니 내 성정을 안 어긴 것이 내 어짐이더라(受命于天賦此身 不遠吾性是吾仁) 사람을 대하며 공경한 마음을 가지고 성의를 베풀며 물건을 접하되 사가 없고 바르고 곧음을 얻었다. (對人存敬陳誠意接物無私得正均) 분수를 따라 온전히 형체밖에 일을 잊고 안상하여 오직 그 가운데 참된 것을 힘쓰는도다. (隨分渾忘形外事安常惟勉箇中眞) 평생에 스스로 생각하매 부끄러울 바 없으니 물에서 고기 낚고 산에서 나무하는 숨은 백성이더라. (平生自憶罔攸愧漁水樵山只逸民)날로 시 읊기를 일삼으며 분분한 세리(紛紛勢利)에 청백하였다. 도원어주(桃源漁舟) 수양채미(首陽採薇) 영수세이도(穎水洗耳圖)를 그려 좌우에 걸고 완상염모하며 때로 어진 벗이 오면 솔나무 그늘 아래서 술 마시고 바둑두며 한가하게 서로 즐기었다. 적차에 어사 이모(李某)가 가만히 와서 시를 써 놓고 갔는데 성조에서 어진이를 구할 뜻이 급하다만 어찌 남쪽 고을에 초일한 백성이 있는 줄 알리요(聖朝正急求賢意那識南州有逸民)하였다. 고종 경오(高宗庚午:一八七○)년에 우로은전(優老恩典)으로 통정자질을 받았다가 뒤에 더하여 가선 및 숭록대부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공이 별세하니 온 고을 사람이 다 슬퍼하니 그 생전에 흠모한 것을 가히 추상하겠고 이른바 수복 강녕 유호덕 고종명(壽福康寧攸好德考終命)의 오복을 공이 자못 겸하고 부끄럼이 없도다. 공의 의용이 괴위(愧偉)하여 상냥한 장자풍이 있어 선(善)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일찍 그 규각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때를 슬퍼하고 세속을 경시한 뜻이 있어 시사를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문장은 간고(簡古)를 좋아하고 부화(浮華)를 싫어하고 붓을 들면 곧바로 끝마치고 또 규구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문집이 있어 집안에 수장하였는데 저술한 것 중에 성이론(性理論)과 명천인(明天人)은 체용(體用)의 대절을 말한 것이요, 감모사(感慕詞)는 종신(終身)토록 어버이를 생각한 지극한 마음이며 거가훈(居家訓)은 의리의 밝음을 끼쳐 가르친 것이라. 이와 같은 글은 한갖 한 집의 사물(私物)이 아니요, 가히 미루어 세교(世敎)에 비칠 것이다. 철(哲)이 젊어서 공의 풍의를 듣고 사사로이 한 번 가르침을 받고저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깊이 부끄럽고 한스럽도다. 이어서 들으니 공의 큰 손자 병욱(炳昱)이 힘써 배워 서화에 정공하여 능히 조무(祖武)를 이었다 하기에 다시 한번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이제 날이 서산에 박두하니 또 가히 이룰 수 없어 그 족인 직현(直鉉)에게 물은 즉 병욱 또한 이미 천고인(千古人)이 되었다 하니 아! 슬프다. 눈깜짝할 사이에 무상한 세월이 진실로 이같을 것인가. 삼가 공의 행략을 살펴 그 행의 대강을 조절하여 이에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의 채택을 바라노라. 순흥(順興) 안종철(安鍾哲) 지음 진사(進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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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7. 17世 〉23. <부정공>죽천거사조공휘현귀묘갈명(竹川居士趙公諱顯龜墓碣銘)